얼마 전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린 젊은 축구선수가 죽음을 선택했다, 오늘은 왕따 당한 어린 중학생이 투신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유명가수도, 유명 영화배우도, 재벌회상 중역도, 총수도, 재벌 아들도, 유명 정치인도, 심지어 대통령을 지냈던 분도, 자살을 선택한 우리국민들이다. 매일 33명의 우리 국민들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통계다. 그 중 한명은 앞날이 창창한 청소년이라는 사실이다. 땅을 치고 통탄해야 할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자살 율 세계 최고라는 자랑스럽지 못한 기록이다.
무엇이 자살로 이끄는가? 나도 한 때 생각해본 적 있다. 난 쌍둥이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쌍둥이 내 반쪽은 폐렴으로 죽었다 한다. 죽음이라는 말을 이해하면서부터, 난 죽은 나의 반쪽을 막연하게 그리워했다. 그의 이름 ( 주민 )을 불러보면서, 어두운 밤하늘의 별들을 오랫동안 쳐다본 적이 많았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에, 그와 함께 하고픈 어린 마음에, 죽음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 또, 머리가 커가면서, 삶이 날 괴롭힐 때 마다, 자살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들은 희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나? 외면된 인기인이 또 다시 조명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다면, 쓰러진 사업을 다시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자신의 결백과 믿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왜 죽음을 택했겠는가.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막연한 연정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했었고, 이 세상은 성공한 자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었어야 한다. 결국 그들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고통을 나눌 수 없었고 희망의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을 통해 자살소식을 들을 때 마다, 후회스러운 과거의 사건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하는 생각이, 지금도 나를 후해하게 한다. 미국에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술 한 잔 하자는 말이었다. 교회에서 만난 친구라 술 한 잔 하자는 말이 조금은 어색했다. 미국 생활이 그런 것처럼, 서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주일마다 교회에서 보는, 교회말로 성도다. 어느 주일 날 저녁, 술 한 잔 하자는 그의 말에 난 “ 우리 집으로 와, 스카치 한자 해” 했는데, 40분 정도나 운전해야 하는 코리아타운에서 한잔하자고 한다. 그 말에 난 꼬리를 내렸다. 그 다음 날 오후, 그의 죽음이 발견되었다. 난 죄책감에 빠졌다. 나의 무관심이....... 그 날, 함께 술잔을 나누면서 그에게 희망을 주고 세상의 삶을 논했다면..... 엄청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우린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야 한다, 살려야 한다 그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