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Sammy Lee
나이가 먹어서 그런 모양이다. 옛 일들과 마주치면 눈을 감고 옛 생각들을 더듬게 된다. 며칠 전 김천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읽고 있었던 신문에 이 분에 대한 기사가 났기 때문이다.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해진 50여 년 전 일이다. 10미터 플랫폼 하이 다이빙을 방금 마치고 흠뻑 젖은 내 양쪽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면서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라는 충고와 함께, 내 이마에 키스를 해주셨던 사람이다.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간 초기 미국 이민자로부터 켈리포니아, 프레즈노 시에서 태어났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유명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향해 가다보면 황금처럼 펼쳐진 목초로 뒤덮인 대평원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농업도시다. 신문에 난 기사 내용은 한국인이 모여 사는 로스엔젤레스, 한인타운 내에 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학교 명칭으로 이 분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Sammy Lee 초등학교 !!!!!!!! 미국에선 학교 이름으로 그 지역과 연관 있는 유명인들의 이름을 붙이는 게 흔히 있는 일이다.
Sammy Lee, 미국 올림픽 역사에서 한 시대를 장식했던 국가적 영웅이었다. 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연이어 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국가적 영웅이다. 플랫폼 ( 높이 10 m ) 다이빙 분야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탄 것은 그 시대 처음 있었던 기록이었다. 타 인종에 대한 인종차별과 선입감으로 가득한 그 시대에 미국국가 대표선수로 금메달을 탄 것이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그 후 USC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비인후과 전문의로서 활동하면서 미국을 다이빙 강국으로 만드는데 공을 세우신 분이시다.
나와 Dr. Sammy Lee와의 짧은 인연은 50여년을 거슬러 간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그 분이 정부초청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매일처럼 다이빙 연습에 열중하던 동대문 운동장 내, 다이빙 수영장을 찾아 어린 꿈나무 선수들을 방문하신 것이다. 그 시대, 국내에서 유일한 올림픽 규모의 다이빙 수영장이었다. 다이빙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한국 다이빙계의 어린 꿈나무를 보러온 것이다. 우리 다이빙 팀들의 연습과정을 유심히 관찰한 후, 칭찬과 함께 운동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잘 해야 된다는 덕담과 함께, 한 수 가르쳐주셨던 기억이 나서다. 그 후 난 46회 전국체육대회 플랫폼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탔다. 나처럼 자그마한 키에 웃음이 가득한 모습이 생각이 난다...... 이제 그 분은 92세가 되셨고 난 60이 넘었다.......
그분에 대한 또 한 소식은 며칠 전, 차를 몰고 나간 후, 연락도 없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부인께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수사결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신용카드로 주유를 했고 또 점심을 먹었다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 헤매신 것이다. 먼 곳을 왜 갔는지 모르신다고 한다. 치매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내 양쪽 어깨를 꽉 잡아주셨고 웃음 가득했던 건강한 그 분의 모습이었는데 ...... 흘러간 세월들로 새겨진 그분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다음, 로스엔젤레스를 방문할 땐 꼭 Sammy Lee 초등학교를 방문하리라. 지금 버스창문 밖으로 모내기를 끝내고 잘 정리된 논이 멋지게 보인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