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야 한다. 작성자 : 이주강     작성일 : 2014-06-26

 

 

잊지 말아야 할 과거

 

어제가 6.25였다. 그냥 지나친 후, 오늘에야 알았다.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후, 우리 사회는 극한 혼란 속으로 휘말렸다. 몽매한 국민들은 민주주의, 공산주의에 관한 정치학문적 내용도 깊이 있게 파악하지도 못한 채, 선동적인 단체들로 인해 둘로 갈라졌다. 이 시대의 극단적 이념 갈등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혼란기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부자 집 아들로 태어나 미국 프린스톤 명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이승만 박사는 남쪽에 민주주의 정부를 설립했고, 전설적인 독립군 김일성 장군을 가장한 짝퉁이 김일성은 이북에 괴뢰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소련을 등에 업은 이북은 모든 국민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일요일 새벽, 한 마디 선전포고도 없이 이남 폭격을 시작한 것이다. 6.25 전쟁이다 !!!!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3년 동안 이어졌으며 세계 전쟁의 역사 중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라고 기록되었다. 한반도 전쟁은 2백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었다. 그 당시, 성숙되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 정부는 물밀 듯이 남하하는 괴뢰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서울시민의 피난길을 막아 버렸고, 수많은 서울 시민들과 피난가족들은 이북 괴뢰군들에 의해 참수되었다. 남한의 민주주의를 지켜주기 위해 참전했던 유엔군도 15만 명이 사망했다. 내 형님도 현충원에 무쳐있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고아와 홀로된 엄마를 만들었다. 천만이 넘는 시민들은 고향을 뒤로 한 채, 자유를 찾아 이남으로 피난 왔다. 우리 가족도 그 중 하나다.

 

, 6.25 전쟁의 폭격이 극에 달았던 7월에 서울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리고 성장 과정 중, 6.25 전쟁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 이번 6.25를 맞이하면서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그리고 나이 많은 형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해본다. 그 중 하나만 들려줄게.

 

내 아버지는 일찍이 의학을 공부하셨다. 의사생활을 포기하고 또 다시 일본에서 영문학을 수하셨다. 그리고 일본의 악행을 피해 중국 길림성 용정에 있는 광명”, 한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독립군들을 양성한 역사적 한인학교다. 1945815일 광복을 맞아 함경도 북청 고향으로 되돌아오셨다. 그러나 곧, 김일성 괴뢰정부의 거짓을 알아차리고 이남으로 피난 오신 것이다. 13명의 자식과 주위 형제를 둔 아버지는 모든 가족을 한 번에 이주시키기가 어려웠다. 어린 자식들부터 이주시키는 과정 중 38선이 그어지고 6.25 전쟁을 맞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내 형님들과 가족들은 이북에 살고 계신다. 셋째 형님은 황해도 해주시에서 보건소 소장 ( 병리학 전문의 )으로 계신다. 택시타면 서울서 4.5000원 나오는 거리다 !! 지난 64년 간 헤어져 있다.

 

내가 하려는 예기는 짧은 그러나 놀라운 내 어머니의 예기다. 어머니는 가장 어린 3명의 형제 ( 2살된 형, 4살된 형, 6살 된 누나 )를 데리고 임신한 몸으로 먼저 서울로 왔다. 그리고 난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폭탄이 떨어지는 722일 늦은 오후 남산 가까운 장충동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이젠 5명이 된 것이다. 이미 서울은 이북 괴뢰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남한으로 피난 온 가족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여지없이 총살되는 상황이었다. 산후관리의 여력도 없이 어머니는 5명의 애들을 데리고 아버지가 미리 피신했던 경상도 진해로 향했다. 한 쌍둥이는 가슴에 앉고 또 한 쌍둥이는 등에 없고, 2살 된 형은 오른 손에 4살 된 형은 왼 손에 그리고 6살 된 누나는 앞에서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서 400 km가 넘는 진해로 걸어가 아버지와 재회했다.

 

우리나라는 병자호란, 임진왜란, 을사조약과 같은 치욕의 역사가 있었고 동족을 살생했던 비극의 6.25 전쟁이 있었다. 잊지 말자. 여러분들의 아버지 세대의 피와 땀으로 세운 한강의 기적, 국제사회가 부러워하며 배우고자 하는 오늘의 대한민국, 여러분들의 자식들을 위해 지켜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주강,

김종건  2014-06-26
짠 하네요.. 애를 엎고 하는 안고 그리고 손에 보따리 그리고 머리에 보따리... 그 먼길을 어찌 우리 부모 형제들이 걸었을까 싶어요. 그날을 잊지 말고 안보의식을 키워야 하는데 요즘은 너무 엉망이죠. 자유와 방종을 헤깔려하는 국민들이 많아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안성현  2014-06-26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를 젖혀두고 우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과거를 잊지않고 성숙한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종건 선생님말 또한 저도 공감 합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르니 우리 모두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주영  2014-06-26
교수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들이 경험에서 우러나온다는것을 실감한는 글이네요.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우리는 모르고 살아가네요. 생사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을지....사소한 이유로 하루에도 아까운 목숨들이 세상을 뜨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박태진  2014-06-27
코 끝이 찡찡합니다 ;;
이중현  2014-06-28
저도 6.25 당일 저녁에서야 그날이 6.25인걸 알았네요.. 어떤 인터뷰에서 6.25가 무슨날이냐며 깔깔거리던 중학생을 본적이 있습니다..교수님의 글을 통해 가슴아프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할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볼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