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러모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오춘수 박사님을 만나 카이로프랙틱을 전공하게 되었고 첫 직장에서 좋은 선배상관을 만나 많은 임상경험과 병원운영에도 좋은 아이디어를 갖게 되었고, 좋은 동료를 만나 파트너 형식으로 개업도 쉽게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난 1980년 중순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LA 중심 지역에 카이로프랙틱 의원을 개업했다. 70-80평 정도 되는 클리닉이다. X-ray 실을 만들고 PT 실을 만들고 하루 50여명 정도의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규모의 어져스트먼트 실도 만들어 Thompson table, Le Ander table, Gonstead Table로 채워졌다. 간호사와 카이로보조 2명을 채용했다. 영어와 한국말 유창한 교포들이다. 카이로프랙틱 철학으로 완전무장한 애들이었다. 난 월, 수, 금을 진료하기로 했고 내 파트너 Dr. Sohn은 다른 지역에 이미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 목 토요일에 진료하기 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교포사회 신문인 미주한국일보에 개업공고를 냈다. 광고를 내면서 광고 영업부 직원에게 조건부로 내 컬럼난을 만들것을 강요(?)했다. 그러면 광고도 지속적으로 하겠다 약속하면서..... 그 다음 주부터 내 건강 컬럼은 매주 나갔다.
병원 주위 5개의 은행을 찾아가 계좌를 열었다. 각 은행의 지점장을 만나 내 소개를 하고 직원들을 위한 요통예방 강의를 제안했다. 물론 내 욕심은 은행직원들이 갖고 있는 건강보험이다.
미국에선 많은 직장인들이 점심을 싸가지고 다닌다. 점심은 병원 주위에 있는 곳을 다니기로 했다. 매일 다른 식당을 찾아다니면서 나를 소개를 했다. 내 명함은 한 달 만에 동이 났다.
다니던 교회 뿐 아니다, 주위 교포사회 교회를 다니면서 건강 특강을 했다. 나중엔 각 교회의 젊은 대학생들로부터 초청강의를 받고 갔다.
젊은 카이로프랙터로서 교포 대학생들을 위한 카운슬링도 맡아서 했다. 후에 이들이 카이로프랙터 2세가 되었다.
교통사고를 처리하는 보험회사 직원들도 만났다.
교통사고와 산재보험 전문 변호사도 만났다. 그 때 만났던 변호사이자 친구가 되었던 Michael Myere는 세계 여행 중이며 이번 10월 달 나를 보로 서울에 온다.
교포 사회에서 가장 부러움을 샀던 스쿠버다이빙 협회와 스키협회 총무를 맡았다.
물론 한인카이로프랙틱협회 ( Korean Chiropractic Association in USA ) 총무도 맡았다. 5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한인 카이로프랙터의 모임이었다. 오춘수 박사님이 최초 회장이셨다. 지난겨울 서울 은퇴하신 그 분을 서울 안국동에서 재회했다.
병원 개업 후, 몇 개월은 그야말로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난 하루 종일, 매일처럼 내 입에서는 카이로프랙틱 이란 말 이외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내 병원은 환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교포, 서울에서 오신 환자, 일본인, 백인, 흑인, 멕시코인.................
근래, 개업하는 회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난 이들이 성공하기를 원한다. 성심껏 그리고 지혜롭게 노력하라. 그대들 노력의 열매는 KCI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내가 개업한 첫 해 연 수입이 얼마였냐고? 돈 잘 번다고 자랑하던 정형외과 전문의, 그 시대에 25만 달라 정도였다. 난 그 다음 해, 최고점 40만 달러를 찍었다.
열심히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