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백인친구, John Davis의 슬픈 이야기 작성자 : 이주강     작성일 : 2014-08-18

(함께 로스엔젤레스로 자동차 여행 중 유타 사막에서 촬영)      ( 내 조카와 뒷 우리집 마당에서 촬영한 John )

 

옛 사진을 정리하는 중, 오래된 백인친구 사진을 찾았다. 팔머 도서관에서 우연하게 만난 백인 친구 John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온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 John은 팔머 학생이 아니다. 로칼 대학에 다니는 얌전한 학생이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났다. 동양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John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린 약속이나 한 듯이 팔머 도서관에서 자주 보면서 많은 말들을 나누었다. 어느 날 John의 집으로 저녁 초대를 받았다. John의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다. 장남의 동양인 친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John의 여동생은 동양인을 직접 마주보는 건 처음이라 한다. 내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는 그들의 눈길을 난 느낄 수 있었다. 우린 식탁에 둘러앉아 옆 사람의 손을 잡고 경건한 식기도를 올렸다. 먼 한국에서 온 나를 위해, 성공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훌륭한 카이로프랙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그날 저녁 목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 있다. 손으로 치료하신 예수님은 최초의 카이로프랙터였다 라는 말씀이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멋진 말씀이었다. 우린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나이가 22살이 되도록 바다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다는 말에, 그 여름 난 John을 데리고 로스엔젤레스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 식구들도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난 그에게 태평양 바다를 보여주었다.

 

집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하던 John은 로스엔젤레스에서 돌아와 곧 나와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리고 동급생인 일본학생 엔도역시 함께 하면서 우린 방을 나누어 쓰는 룸메이트가 되었다. John의 비극이 한 발짝 가까워졌다.

 

팔머 대학엔 일본학생이 제일 많았다. 그 다음 타이완 학생, 홍콩학생 그리고 한국인은 나와 캐나다에서 온 교포학생 둘 뿐이었다. 난 자연스럽게 일본학생들과 친히 지냈다. 그리고 John 역시 자연스럽게 일본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John이 특히 가까이 했던 일본학생 신고라는 팔머 상급반 학생이 있었다. ‘켐포라는 일본식 태권도 4단이나 되는 유단자다. 팔머 대학 캠퍼스 내에 켐포클럽을 조직하여 백인학생들에게 인기짱인 팔머 학생이다. 부인과 딸을 두었으며 그의 머리는 항상 면도로 밀어 반짝거렸다. 전형적 일본 무인다운 매력을 지닌 그가 John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John신고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를 빼앗긴 기분? 그것으로 고통 받을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고의 과도한 자기중심적 성격과 행동이 날 걱정하게 했다.

 

다음 해, ‘신고는 팔머를 졸업했다. 그리고 John은 나에게 깜짝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신고와 함께 자기도 떠나겠다는 말이다. 한 동안 신고와 함께 로스엔젤레스에서 있다가 일본으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John은 자신의 비극적 삶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신고를 따라 로스엔젤레스로 간 John에겐 아무 연락도 없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786.........( 278 class ) 나도 드디어 졸업했다. 새롭게 태어난 기분으로 난 집으로 향했다. 이제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켈리포니아 주면허 시험을 통과하고 카이로프랙틱 닥터로서,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학생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돈 잘 벌고 폼 나게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졸업식을 마친 후, 데븐포트를 떠나기 전 날이다. John 부모님께서 나에게 부탁하신다. 로스엔젤레스에 가거든 John을 꼭 찾아보라고 !!!! 떠난 후부턴 연락이 두절됐다 한다. 불현듯 불길한 맘이 들었다. 목사님 말씀대로 난 John을 찾았다. 그를 찾은 곳은 일본 무도협회가 운영하던 켐포 도장에서다. 머리를 빡빡밀고 일장기가 달린 도복을 입고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켐포 무도 선생이 된 것이다. 예기치 못한 그의 모습에 난 황당했다. 벌레하나 못 죽이면서 나보러 잡아달라고 했던 John이 도복을 입었다. 반가움 보다는 어색한 재회였다. ‘신고는 일본으로 돌아가 카이로프랙틱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으로 곧 초청하겠다는 신고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로스엔젤레스 일본인 도장에서 땀 흘리며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장기가 붙은 도복을 입은 John에게 “John! 아버지가 널 찾으신다, 전화 한번 드려그리고 난 돌아 나왔다. John은 평온해 보이지 않았다.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온 난, 물 만난 한 마리의 상어였다. 주면허 시험도 통과했고..... 병원개업도 했고..... 장가도 갔고..... 항상 갖고 싶었던 마랜츠 스테레오도 샀고 스포츠카도 샀다 !!!! 꼭 하고 싶었던 스쿠바 다이빙과 스키도 배우고........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 관심 밖이었다. 난 주말마다 해변가와 눈덮힌 산을 찾았고 마랜츠 스테레오 소리에 취해 세속적 삶에 빠져있었다. 오매불망 일본인 신고의 초청만 기다리고 있던 John? 우리 사이에 연결고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때때로 주고받았던 전화통화는 짧은 시간에 끊어졌다. John은 결국 일본 타운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John의 아버님, 목사님께서 통곡하는 목소리로 전화 주셨다. 그리고 자살했다는 John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산속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호스로 연결해, 그는 죽음을 택한 것이다. 목사님이 한마디 하셨다. “주강아, 너랑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난 눈물 이외엔 할 말이 없었다. John에 대해 그 동안 무관심했던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신고는 일본에서 카이로프랙틱 병원을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과거 역사를 애써 외면하려는 현 일본 아베수상의 과도한 우익적 행동이 미워진다.

안성현  2014-08-18
단 한장의 사진이지만 고인의 순수한 마음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나마 편안한 삶을 사셨으면 하네요. God bless John
이중현  2014-08-19
굉장히 슬픈 이야기네요..왠지 '한사람'을 향해 원망의 화살이 돌아가기 쉽겠지만 그 부분은 차치하고 마지막 문장에서는.. ㅎ 진짜 일본은 왜 이러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