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 제일 카이로프랙틱 클리닉" 작성자 : 이주강     작성일 : 2014-10-02

1986년, 치료받으로 내원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장녀, Susan Curdy

 

70년도, 카이로프랙틱 의학은 미국 교포들에게도 낯설은 말이었다. 그 시절 미국 우리교포 사회는 지금처럼의 인구 규모가 아니었다. 1900년 초반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계약을 끝내고 켈리포나이아 주로 이주한 초기 한국인들, 교육만이 잃어버린 조국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던 독립운동가, 초기 대한민국 정부 유학생들이 교육을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눌러앉게 된 유학생들, 월남전쟁 후 미국으로 향한 한국인들, 오로지 돈 벌기 위해 독일로 향했던 광부와 간호사들, 정부정책으로 보냈던 남미 (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등등 ) 농업 이민자, 한국에 주둔하던 미국 군인들과 결혼 후 이주한 여성.... 이런 그룹으로 구성된 소수의 교포들이 로스엔젤레스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때였다. 그 후 국가 정책적으로 미국 이민이 허락되면서 이민의 물결이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그들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밤낮으로 뛰며 살아갔다. 건물청소사업, 도넛츠 가게, 세탁소, 편의점, 재봉사업, 벼룩시장 떠돌이 장사.......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고 꼬빡 서있어야 하는 일들이다. 아니면 저녁에 나가 밤새도록 일하고 새벽에나 되어야 귀가하는 일들을 했다.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교포들은 허리가 끊어지게 아파도, 열이 펄펄 나도 쉬지 못하고 백 원짜리 진통제나 해열제 두알 먹어가면서 노동 하였던 시대였으니까. 추가 노동시간 또는 주말에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상사의 눈치를 보던 그들에게 카이로프랙틱 치료는 그야말로 건강보험 없이는 받기 어려운 비싸고 호사스러운 치료였다. 그들에게 미래 건강은 사치일 뿐이었다. 자식들 교육을 위해 돈을 저축해야했고 실시간 생존을 위한 삶이였기 때문이다. 미대 교수출신 교포들은 싸구려 그림 베끼는 일을 했고, 이화여대 패션과 교수 출신들은 재봉틀 앞에 앉아 하루에 몇 백 장씩 싸구려 티셔스를 만들고, 공대교수 출신들은 흑인들과 멕시코 노동자들 사이에서 함께 땀을 흘렸고, 특별 전공이 없는 사람들은 장사 길에 나서야만 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난 부모님 덕에 공부할 수 있었다, 또 부지런했던 내 두 다리는 카이로프랙틱 클리닉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진통제만 복용하던 교포환자들에게 방사선 검사, 3달 동안 이어지는 카이로프랙틱 치료는 그들에게 값비싼 사치였다. 그러나 난 끊임없이 그들을 위해 건강을 말하였다. 서서히 건강보험, 산재보험, 교통사고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환자들로 바빠졌다. 한참 젊은 나이였는지, 일 욕심이 났다. LA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제 2 클리닉을 열고 화요일과 목요일 그리고 토요일은 여기서 진료를 했다.

 

난 산재와 교통사고보험 환자들에게 더 집중했다. 이유는 치료단가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환자들은 흔히 변호사들이 개입되어있고 정형외과나 신경외과로 주로 보내져 젊은 신참 카이로프랙터에게 오지 않았다. 대개 변호사들이 원하는 병원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뻔 하자나! 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내게 많은 케이스를 보내게 된 계기가 있었다.

 

교통사고 후 후유증이 심했던 한 사례였다. 보험회사 측 신경외과 의사는 방사선 검사, EMG 검사, Thermography 검사결과를 보면서 이 환자의 고통은 보상을 위한 허위적 사례라고 말했고, 이에 따라 보험회사는 보상지불을 거부하여 법정까지 가게 된 사례였다. 결국 이 환자는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자발적으로 내 클리닉을 찾아왔고, 3-4주 정도의 어져스트먼트를 통해 환자의 통증을 말끔히 회복시킨 대가(?)로 난 법정 증인으로 나가게 되었다. 난 환자의 cervical x-ray를 준비했다. 그리고 전형적인 카이로프랙틱 subluxation 진단, ASRP 그리고 사고 후 발생한 경추의 저전만, hypo-lordosis의 생체역학적 의미를 배심원과 보험회사 측 의료진 앞에서 연설적 증언을 했다. 결과? 환자보상은 요구한대로 100%가 지불되었고 추가적으로 미래 발생 가능한 예후를 위해 환자가 원할 때까지, 시간적 제한 없이, 나에게 지속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치료권을 부여받았다. 소문은 빨랐다. 정형외과, 신경외과 의사들에게 주로 소개했던 상해 전문변호사들이 나에게 환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난 더 바빠졌다.

 

Chiropractically yours,

 

한주영  2014-10-02
왠지 상상이 갑니다. 영화에서 보던 법정에서의 반전의 묘미가 그런게 아닐까요?ㅎㅎㅎ
이중현  2014-10-04
역시 임상에서 항상 생각해야 하는 부분중에 '아프니까 당연히 치료 받아야지'가 아니라 무엇이 문제 인지 정확히 짚어주고 왜 치료 받아야하는지 설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인데요..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잘되는데는 다 이유가 있겠죠??!!^^
안성현  2014-10-07
역사적인 사진이네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장녀 수잔 커디 여사님은 아버지 못지않은 삶을 지내셨네요. 수잔 커디여사님이 궁금 하신분은 링크 참조하세요.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9mye&articleno=17782174&categoryId=908005®dt=20140711173138
허성무  2014-10-07
영화화해야될 스토립니다;;
이재훈  2014-10-29
교수님과 수잔 커디 여사님 두분이 많이 닮으셨어요~ ㅎㅎ
최규호  2014-11-24
교수님 젊었을때 사진 웃음은 지금까지도 똑같으세요 ㅎ 신기신기~^^ 왠지법정 연설장이 학회 수업같았을꺼 같다고 생각이 드는건...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