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travels like a arrow.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시간이 간다는 말이다. 제일 카이로프랙틱 클리닉 개업한지도 벌써 10년이 된다. 로스엔젤레스 한인 타운 북쪽에 있는 “San Fernando Valley” 지역에 둘째 클리닉을 개원한지도 한참 됐다. 이 곳은 내가 사는 동네이기도 했고 화, 목, 토는 이곳에서 진료를 했다. 지난 10년........ 복 받은 지난 십년이다.
주말이면, 난 바닷가 아니면 산에 있었다. 여름이면 바닷가에서 스쿠버 다이빙에 미쳐 켈리포니아 해변 바다 속을 뒤지고 다녔고, 겨울이면 맘모스 스키 리조트에서 모굴 스키에 열중했다. 일 년 내내 내 얼굴은 남태평양의 사모아 인처럼 검게 그슬러 있었고, 사나운 강아지 콧잔등 성한 날 없다는 말처럼, 스쿠버 다이빙 사고로 내 오른쪽 얼굴은 마치 조직의 행동 대원처럼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나의 카이로프랙틱 두 손은 산호에 글켜 성할 날이 없었다. 집사람과 어머니의 만류에도 스쿠버 다이빙 어드밴스 코스를 수료하고 세컨드 인스트럭터 자격을 수료한 후, 한인수쿠버협회 회원들 교육에 앞장섰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미친 듯이 했는지 모르겠다. 젊음의 홀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삶의 불만 때문이었는지...... 난 워크홀릭처럼 일했고,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이 삶을 살았다.
머릿속에 건방진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날, 집사람에게 폭탄 같은 선언을 했다. “ 병원 문 닫고 일 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겠다고!” 물론 엄마와 형제들은 날 미쳤다고 했다. 집사람을 더 야단치셨다. 난 쉬고 싶었다. 지난 십여 년간의 타올랐던 불꽃같은 열정이 빠르게 사라진 것이다. 마음을 결정한 후, 후배 카이로프랙터에게 클리닉을 양도했다. 나이 40에 일 년을 은퇴한 것이다! 주위 친구들이 평생 먹을 걸 쌓아 두었냐고 묻는다. 하하하하. 그 동안 잘 벌긴 했지! 하지만, 저축해놓은 자금력 보단 원할 때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는 자만 때문이었다. 카이로프랙틱으로 수련된 내 두 손은 황금 알을 낳는 손이 아닌가? 난 계획대로 일 년간 은퇴했다! 나이 사십에..........
백수로서의 그 첫날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도 절로 웃음이 난다. 남들은 출근하려 바쁜 아침 시간이다. 난 파란 잔디로 덥혀있는 뒷마당 수영장, 파라솔 그늘 밑에서 모닝커피와 함께 신문을 읽었다. 켈리포니아의 아침 햇쌀을 즐겼다 . 그 날 하루는 온 종일 “ Time out " 이란 책을 읽었다. 이번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된 책이다. ”때론 쉬어가라“는 심리학자가 쓴 책이었다. 그리고 여행계획을 세웠다.
두 아들은 초등학교 2, 3 학년에 있었다. 선생님들에게 내 계획을 말하고 3개월간의 숙제물을 받아왔다. 집사람의 밴 자동차를 개조해 4명이 잘 수 있는 침대를 넣었고 캠핑 장비를 실을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으로 만들었다. 물론, 내 기타도 실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 그리고 난 가족과 함께 집을 나섰다. 로스엔젤레스에서 5시간 떨어진 라스베가스, 환락의 도시에서 몇 밤을 보낸 후, 난 본격적인 여행길에 올랐다. 우린 며칠 밤을 사막의 밤하늘에 감격했다....... 도시 불빛을 벗어난 밤하늘의 별들이 어찌 그리 아름답게 빛나던지..... 무한이라는 우주공간을 난 상상의 나래를 피고 밤새도록 유영하고 있었다. 5만년 동안의 풍화로 다듬어진 ‘자이언 국립공원’의 샌스톤 자연 조형물들은 조물주 손길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랜드 캐년의 깊고 광대한 계곡은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게 했고, 엘로스톤 국립공원의 경이로움은 나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의미를 깊이 알려주었다. 숲속에서 먹는 아침은 새들과 함께했고, 사슴과 다람쥐는 우리주위를 맴돌았다. 들소 무리들이 달릴 때는 지구의 지축을 흔드는 듯 내 발밑을 진동시켰고 회색곰과 순록은 먼발치에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뿐인가.......호수같이 잔잔한 오레곤 주의 모래 해변가 Cannon Beach....... 해가 저무는 석양을 옆에 두고 비키니 차림으로 말달리는 그 여인들의 모습은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아......... 누가 미국을 美國 이라고 했던가. 우리 가족은 구릅버스를 타고 지나치는 호사 여행객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애들은 캄보니아 시골 애들처럼 변하고 우리 부부역시 국경을 막 넘어온 난민처럼 꾀죄죄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연의 두려움과 호사스러움을 누리던 3개월의 시간은 허무하도록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갈 줄 몰랐다. 클리닉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한 그 시간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난 한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번엔 혼자서다. 집사람을 어렵게 설득한 후, 84년 세계카이로프랙틱 ICA 서울 컨퍼런스에 참석한지 5년 만에 다시 난 서울로 혼자 왔다. 그리고 홀로한 한국여행 한 달은 또 다시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 주었지만, 자만에 빠져 Time Out을 외친 나에게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국 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나에게 “ 간농양, liver abscess" 주셨다. 그리고 91년이 돼서야 회복되어 다시 개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 년간의 Time Out은 고마웠고 즐거웠던 시간이었지만, 자만의 죄 값은 ” 간농양“으로 치렀다. 남들 일할 때 같이 일하고 남들 놀 때 같이 놀아야 되는 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