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의 죄 값 ? 작성자 : 이주강     작성일 : 2015-02-11


 

Time travels like a arrow.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시간이 간다는 말이다. 제일 카이로프랙틱 클리닉 개업한지도 벌써 10년이 된다. 로스엔젤레스 한인 타운 북쪽에 있는 “San Fernando Valley” 지역에 둘째 클리닉을 개원한지도 한참 됐다. 이 곳은 내가 사는 동네이기도 했고 화, , 토는 이곳에서 진료를 했다. 지난 10........ 복 받은 지난 십년이다.

 

주말이면, 난 바닷가 아니면 산에 있었다. 여름이면 바닷가에서 스쿠버 다이빙에 미쳐 켈리포니아 해변 바다 속을 뒤지고 다녔고, 겨울이면 맘모스 스키 리조트에서 모굴 스키에 열중했다. 일 년 내내 내 얼굴은 남태평양의 사모아 인처럼 검게 그슬러 있었고, 사나운 강아지 콧잔등 성한 날 없다는 말처럼, 스쿠버 다이빙 사고로 내 오른쪽 얼굴은 마치 조직의 행동 대원처럼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나의 카이로프랙틱 두 손은 산호에 글켜 성할 날이 없었다. 집사람과 어머니의 만류에도 스쿠버 다이빙 어드밴스 코스를 수료하고 세컨드 인스트럭터 자격을 수료한 후, 한인수쿠버협회 회원들 교육에 앞장섰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미친 듯이 했는지 모르겠다. 젊음의 홀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삶의 불만 때문이었는지...... 난 워크홀릭처럼 일했고,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이 삶을 살았다.

 

머릿속에 건방진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날, 집사람에게 폭탄 같은 선언을 했다. “ 병원 문 닫고 일 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겠다고!” 물론 엄마와 형제들은 날 미쳤다고 했다. 집사람을 더 야단치셨다. 난 쉬고 싶었다. 지난 십여 년간의 타올랐던 불꽃같은 열정이 빠르게 사라진 것이다. 마음을 결정한 후, 후배 카이로프랙터에게 클리닉을 양도했다. 나이 40에 일 년을 은퇴한 것이다! 주위 친구들이 평생 먹을 걸 쌓아 두었냐고 묻는다. 하하하하. 그 동안 잘 벌긴 했지! 하지만, 저축해놓은 자금력 보단 원할 때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는 자만 때문이었다. 카이로프랙틱으로 수련된 내 두 손은 황금 알을 낳는 손이 아닌가? 난 계획대로 일 년간 은퇴했다! 나이 사십에..........

 

백수로서의 그 첫날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도 절로 웃음이 난다. 남들은 출근하려 바쁜 아침 시간이다. 난 파란 잔디로 덥혀있는 뒷마당 수영장, 파라솔 그늘 밑에서 모닝커피와 함께 신문을 읽었다.  켈리포니아의 아침 햇쌀을 즐겼다 . 그 날 하루는 온 종일 “ Time out " 이란 책을 읽었다. 이번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된 책이다. ”때론 쉬어가라는 심리학자가 쓴 책이었다. 그리고 여행계획을 세웠다.

 

두 아들은 초등학교 2, 3 학년에 있었다. 선생님들에게 내 계획을 말하고 3개월간의 숙제물을 받아왔다. 집사람의 밴 자동차를 개조해 4명이 잘 수 있는 침대를 넣었고 캠핑 장비를 실을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으로 만들었다. 물론, 내 기타도 실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 그리고 난 가족과 함께 집을 나섰다. 로스엔젤레스에서 5시간 떨어진 라스베가스, 환락의 도시에서 몇 밤을 보낸 후, 난 본격적인 여행길에 올랐다. 우린 며칠 밤을 사막의 밤하늘에 감격했다....... 도시 불빛을 벗어난 밤하늘의 별들이 어찌 그리 아름답게 빛나던지..... 무한이라는 우주공간을 난 상상의 나래를 피고 밤새도록 유영하고 있었다. 5만년 동안의 풍화로 다듬어진 자이언 국립공원의 샌스톤 자연 조형물들은 조물주 손길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랜드 캐년의 깊고 광대한 계곡은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게 했고, 엘로스톤 국립공원의 경이로움은 나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의미를 깊이 알려주었다. 숲속에서 먹는 아침은 새들과 함께했고, 사슴과 다람쥐는 우리주위를 맴돌았다. 들소 무리들이 달릴 때는 지구의 지축을 흔드는 듯 내 발밑을 진동시켰고 회색곰과 순록은 먼발치에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뿐인가.......호수같이 잔잔한 오레곤 주의 모래 해변가 Cannon Beach....... 해가 저무는 석양을 옆에 두고 비키니 차림으로 말달리는 그 여인들의 모습은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 누가 미국을 美國 이라고 했던가. 우리 가족은 구릅버스를 타고 지나치는 호사 여행객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애들은 캄보니아 시골 애들처럼 변하고 우리 부부역시 국경을 막 넘어온 난민처럼 꾀죄죄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연의 두려움과 호사스러움을 누리던 3개월의 시간은 허무하도록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갈 줄 몰랐다. 클리닉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한 그 시간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난 한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번엔 혼자서다. 집사람을 어렵게 설득한 후, 84년 세계카이로프랙틱 ICA 서울 컨퍼런스에 참석한지 5년 만에 다시 난 서울로 혼자 왔다. 그리고 홀로한 한국여행 한 달은 또 다시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 주었지만, 자만에 빠져 Time Out을 외친 나에게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국 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나에게 간농양, liver abscess" 주셨다. 그리고 91년이 돼서야 회복되어 다시 개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 년간의 Time Out은 고마웠고 즐거웠던 시간이었지만, 자만의 죄 값은 간농양으로 치렀다. 남들 일할 때 같이 일하고 남들 놀 때 같이 놀아야 되는 거였는데!

안성현  2015-02-11
학창시절 교수님에게 들었던 많은 이야기는 지금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한가지더 교수님이 아프다고 하시면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좋은글 감사힙니다.
한주영  2015-02-11
가족여행 정말 부럽습니다 ^^
나강호  2015-02-12
남들 일할 때 같이 일하고 남들 놀 때 같이 놀아야 되는 거였는데 이 말한디가 40인 저도 time out하려다 못하겠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