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았던 기회. 작성자 : 이주강     작성일 : 2015-02-13


              ( 중앙에 계신 분이 DR. Phillips, 오른쪽에 계신 분, 김광우 서울대학 의과대학 교수, 그리고 나

 

“ Time Out "은 끝났다. 그리고 난, 솔로 개업의 생각을 버리고 3명의 미국인 DC들과 ”Winnetka Chiropractic Group“ 에 파트너가 되었다. 파트너 형태의 개업은 여러모로 현명한 그 시대의 개업 방법이었다. 90년도에 들어와 미국엔 HMO 라는 건강 보험계에 혁신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모든 의료인들의 수입이 크게 줄게 되었다. 미국 의료비는 거의 살인적이라는 사실 여러분들도 잘 알 것이다. 아주 부자거나,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국가보조금을 받아 살아가는 수준이 아니라면 모든 가정은 건강보험비로 허리가 휠 정도를 넘어 파산에 이를 수 있는 수준이다. 고연봉에 잘 살고 있는 내 친구들도 수술비가 넘 비싸 서울에 와서 수술 받는다. 자기 부담금만으로도 서울에 오면 수술 받고 놀다 갈수 있을 정도니까.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보험회사들의 혁신적 아이디어로 태어난 것이 HMO 시스템이다. 간단한 구조다. 보험회사가 지정하는 의사와 병원에만 가야하는 규정이다. 새로운 시스템은 그 시절 돈 잘 버는 의료인들에겐 막대한 손실이며 건강보험회사는 부를 축척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결국 국민들에게 건강보험료를 약간 낮추는 일시적인 효과는 있었지만, 의료인과 환자들 사이에 신뢰를 무너트렸고, 의료소송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결과를 나았다. 결과적으로 의료비가 더욱 가중되는 현실을 낳게 되었고 어부지리는 의료소송 변호사의 몫이 되었다.

 

새로운 상황에서 클리닉 개업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낼 수 있는 파트너식 경영 방법이다. Winnetka Chiropractic Group3명의 유태계 DC ( Dr. Wexler, Seth, Allan )들로 구성된 구릅이며 이 지역에서 가장 알려진 카이로프랙틱 클리닉이었다. 클리닉은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 4명의 DC가 함께 진료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 방사선기사, 보조 물리치료사, 그리고 치료 마사지사들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답게 트레인 되어 있는 사무직 여성 직원들을 보면서 내가 몰랐던 한 단계 높은 클리닉을 이들은 경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환자유치 계획을 귀 세워 듣고 있던 이들은 나의 프로파일을 보고 까다롭지 않게 파트너로 허락하였고, 파트너식 개업은 나의 개업 과정을 쉽게 해주었다. 물론 내 환자 수는 빠르게 증가하였고 내 파트너들을 해피하게 만들었다.

 

, 매주 목요일은 휴진하고 LACC 대학에 나갔다. 파트너들은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난 고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의 삶을 바꾸어준 일이 발생했다. 신촌 연세대학병원 물리치료실, 김인숙 실장님이신 내 친구 누나가 찾아왔다. 미국에 있는 동생 집을 방문했다가 내 병원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연세대학병원 재활의학과 과장, 전세일 교수님을 소개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난 연세대학 의과대학병원에서 세미나를 부탁하는 초청장을 받게 되었다.

 

국내 의과대학에서 최초로 진행된 카이로프랙틱 세미나였다. 카이로프랙틱을 바라보는 의료인들의 시각은 여전히 냉담했던 시절이었다. 그 때 세미나에 참석했던 물리치료사들은 그저 바라만 보는 시대였다. 뿐만 아니다. 카이로프랙틱은 목욕탕 때밀이가 하던 시대였다. 전세일 교수는 국내 의료계에 처음으로 재활의학과를 시작하셨고 전문의 과정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국 UP 의과대학에서 진료하시면서 카이로프랙틱을 접하셨던 분이시다. 연세대학병원 강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러 의과대학 강의초청이 이어졌다. 정형외과의 대부이셨던 카톨릭의과대학 재활의학과 강세윤 교수님의 초청을 받았고, 국내 플로로 테라피를 전파한 중앙대학 의과대학 서경묵 교수.... 난 카이로프랙틱을 전했다. 뿐만 아니고 RAND, Manga Report, Australia Study, New Zealand Study , 세계적인 카이로프랙틱 보고서를 전해주었다.

 

난 미국으로 돌아간 후, LACC 카이로프랙틱 대학 총장, Dr. Reed Phillips 에게 보고했다. 누군가 카이로프랙틱을 전해야 한다고. 그 후부터 난 한국에서 강의초청이 올 때 마다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강의초청은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시절 난, 유일한 카이로프랙틱 대학 교수였고 임상경험을 갖고 있는 유일한 DC 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성용  2015-02-13
학회장님의 지난 과거 얘기가 한편의 영화를 보듯 너무 재밌습니다^^ 1990년도 후반, 카이로프랙틱이 우리나라에 한창 알려지기 시작할 시기, 그 중심에 회장님이 계셨군요. 현 시대의 젊은이들은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카이로프랙틱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답니다. 앞으로도 많은 조언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드립니다.
한주영  2015-02-13
동감합니다.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되니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