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장했던 두개골은? 작성자 : 이주강     작성일 : 2010-06-26
모형이 아니고 진품 두개골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 두개골의 태생은 "이디오피아" 인것으로 알고 있다. 어렵게 구한 이 두개골은 오랫동안 내 서재에 가지런히 다른 책들과 함께 놓여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고향으로 보내지 못했지만, 내가 살던 Agroura Hill 이라는 동네 앞 작은 공원, 1 m 깊이의 땅속에 편히 잠들고 있을 것입니다. 무슨 사연? 지금 부터 그 사연을 쓰려고 합니다. 호진이가 내일 아침 출근 후, 한잔의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이 글을 재미있게 읽기를 바란다.

79년 켈리포니아 주 면허시험을 통과 한 후, 난 한 동안 중급 정도의 종합병원에서 환자를 보다, Dr. Calvin Sohn ( 내가 제일 존경하는 Korean Chiropractor ) 선생과 함께 개업을 하였다. 그 분은 소위 말하는 백인 동네에 이미 개원하였지만 우리 교포가 모여 살고 있는 Korean town에 두번째 병원을 운영하고 싶어 나와함께 공동으로 개업하게 되었다 ( 물론 나에겐 첫째 개업 병원이었지만 ). 32년이라는 세월이 정말 엇그제 처럼 느껴지네요. Chiropractic 철학에 뜨거워져 있었던 나는 그야 말로 초원에 풀어논 야생마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내 병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환자로 붐벼있었고 6개월이 지난 후 병원 파트너였던 Dr. Sohn은 " 이 병원은 자네가 전적으로 운영해야 할 것 같네 " 하시면서 모든 운영권을 저에게 물려 주시고 백인동네에 있는 병원에만 전념하시겠다고 돌아갔습니다. 정말 그 시절엔 세상이 다 내 손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Chiropractic subluxation 철학으로 무장한 나는 거침없는 하이킥을 보이는데로 날렸습니다. 교포 신문에 건강칼럼을 쓰고, 다니는 곳 마다 " 건강강의"를 통해 난 Chiropractic 전도사였습니다. 열정적으로 노력했던 대가는 미국삶의 풍요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난 은백색의 스포츠카를 타고 Eagles의 음악을 들으면서 병원으로 출근하였고 귀여운 간호사들은 뜨거운 커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0-50여명의 환자를 보고나서 병원문을 나서면 여전히 뜨거운 로스엔젤레스의 석양은 나의 발길을 Wilshire Ambassador Hotel ( Robert Kennedy, 법무부장관이 저격당한 곳 )로 향하게 했지...... 2병의 하이네켄 맥주는 내 하루를 마감하는 생명수였습니다. 때론 문제의 시작점이기도 했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해가 지는 서쪽으로 난 내 스포츠카를 몰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America 라고 하는 가수의 Ventura High Way 음악을 기억하시나요? 바로 그 길을 타고 가는 겁니다. 집을 향하는 길이지만 계속간다면 켈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해변가를 통해 San Francisco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나의 주말 생활은 바닷가와 스키장 두 곳 뿐이였습니다. 골프는 not my style !!!!! 내 Scuba 장비는 마치 특수부대원 수준이였죠. 칼, 창, 물속에서 발사되는 총, wet suit, BC, depth gauge, pressure gauge....... 내 오른쪽 눈 주위의 상처는 그 때의 내 젊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난 어느 대원보다 제일 큰 고기를 잡았고, 제일 깊은 곳에 들어가 심해의 두려움을 마주했습니다. 그림 같은 별장이 있었던 Mammoth ski slope에선 두려움을 모르는 스피드 광이였고 우리 스키 회원들만 알고 있는 장소에, 산등성 눈속에 숨겨논 와인을 마시면서 겨울의 호사스럼을 만긱하는 나의 복받은 생활이였습니다. 내 삶은 이렇게 행복할 것이라고 만 생각들었죠. 하지만...................................... life is such a unpredictable thing.

내가 사랑했던 형님, 이주영. 지금도 형님 생각만 하면 맘이 우울해 진다네. 갑자기 쓸어진 형님은 뇌암 ( astrocytoma ) 진단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형님의 모습은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이면 부모형제 모두 모시고 동네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였는데 갑자기 커피잔을 떨어트리는 형님의 모습은 우리 형제 모두를 우울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형님 투병의 시작일 뿐이였습니다. 얼마 후, 건강하셨던 아벗님께서 식도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초대 연세전문대 의학과를 졸업하신 의학도였지만 의사가 싫다고 또 다시 영문학을 전공하신 후 평생을 영어선생님으로 사셨던 분이십니다. 출혈이 발생할 때 마다 고통스러운 지혈치료가 얼마나 힘드셨는지, 아벗님께선 지금 말하는 "존엄사" 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따스하게 느껴지던 아침 시간에 형제 모두가 바라보는 병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86세였습니다. 담배만 안피셨다면 오래사셨을 텐데.... 내가 사랑하던 여동생, 이경자....... 이혼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다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심각한 뇌손상으로 사망한줄 알았던 동생이 일주일 만에 살아났지만....... 병원의 부주위로 기관지 염증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우리 형제들은 눈과 손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여동생은 새로운 삶을 잘 살고 있지만......... 그 시간, 집안의 모든 우환과 고통의 씨앗은 어디서 부터 왔는지......

난 어느날 저녁, 서재에 홀로 앉어 산 아래에 내려 보이는 집들을 바라고 있는데 문득 두개골이 생각이 났어. 머리를 돌려 책장 높은 쪽을 올려다 봤을 때 책속에 몯혀있었던 그 두개골이 나의 고통을 알고 있는 듯...... 바라 보고 있는거야. 그리고 나에게 속삭이듯이 " 날 묻어라 " 라는 부탁이였어. 난 두개골을 꺼내들고 항상하던것 처럼 시상봉합, 관상봉합, 접형골, 측두골을 촉진했지. "이디오피아" 인의 시신은 팔려온거야. 시신은 해부학실에서 난도질 당했고, 골격은 손질되어 내 손에까지 오게됬고. 갑자기 내 속 깊이 흐르던 사마니즘의 문화가 살아나게 되었지. 아마도...... 집안의 모든 우환이.....바로 이 두개골의 저주가? 갑자기 형, 아벗님, 누이동생 생각이 함꺼번에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오면서 생각을 멈출수가 없었어. 집사람과 두 아들은 이미 자고 있었고...... 난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두개골을 들고 방문을 나섰어. 마치 여름밤에 보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난 주차장 실에서 두개골을 신문지로 조심스럽게 싼 후, 삽을 들고 집 앞 공원으로 향했지. 그 때 내 가슴은 살인을 저질은 후 시신을 매장하는 살인자 처럼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땅을 파기 시작했지. 그 동네는 산자락에 있어 밤이면 야생 늑대가 울고, 부엉이가 뱀을 잡아 먹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산속 동네였지 ( 영화배우, Jody Foster 그리고 Frazier가 사는 동네 ). 가로등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진 곳을 선택한 후, 두개골을 조심스럽게 묻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소장했던 두개골은 지금도 그 곳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후, 집안의 우환은 ?.... time heals everything. 형님은 그 해 크리스마스 이틀 전 돌아가셨고, 형님의 아들은 소아과 의사가 되었고, 아벗님은 평화스럽게 돌아가셨고, 동생은 새롭게 만난 남편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잘살고 있고.... 난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있고.......
Happy ending story of mine.
 
(2010년 1월 작성된 글이며 관리자에 의해 재등록되었습니다)